취업전략

취업지식

대기업 직무적성검사 대비 : 기사를 통해 배우는 역사이야기 최근 대기업 입사전형에서 '역사'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삼성직무적성검사(GSAT)에서는 역사관련 문항을 늘린다고 발표했으며, 현대ㆍ기아자동차 역시 인ㆍ적성 검사에서 '역사에세이'를 작년부터 도입했습니다. SK그룹 또한 2014년 상반기 채용부터 한국역사영역을 신설할 예정입니다. 이렇듯 채용과정에서 역사의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기 때문에 에듀스에서는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분들이 역사를 학습하시는데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제작하였습니다.
  • 목차보기
  • 트위터
  • 페이스북
대기업 직무적성검사 대비 : 기사를 통해 배우는 역사이야기
최근 대기업 입사전형에서 '역사'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삼성직무적성검사(GSAT)에서는 역사관련 문항을 늘린다고 발표했으며, 현대ㆍ기아자동차 역시 인ㆍ적성 검사에서 '역사에세이'를 작년부터 도입했습니다. SK그룹 또한 2014년 상반기 채용부터 한국역사영역을 신설할 예정입니다. 이렇듯 채용과정에서 역사의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기 때문에 에듀스에서는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분들이 역사를 학습하시는데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제작하였습니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사까지 시대별 주요사건 및 인물에 대하여 기사를 통해 손 쉽게 익힐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 선사시대

1) 구석기 : 우리나라의 구석기 유적지

구석기인들은 집을 짓고 불을 피우며 살았습니다. 집터에서 발견된 머리털을 분석한 결과, 지금의 인간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이들은 모래돌을 사용해서 불을 피웠고, 돌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2) 신석기 : 자연물을 숭배한 시대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자연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 호랑이나 곰 같은 동물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으며 그들에게 농사가 잘되기를 빌기도 했었죠. 가뭄이 지속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3) 청동기 : 고인돌 크기의 비밀

우리나라에는 4만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는데, 이는 전 세계의 모든 고인돌을 합친 숫자보다도 훨씬 많다고 합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의 일종으로 고인돌을 크게 만든 이유는 청동기시대의 지배자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라고 하네요.

2. 초기국가

1) 초기국가의 성립과 경제적 변화

우리나라 최초국가인 고조선부터 삼한까지 초기국가의 성립과 시대에 따른 경제적 변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은 기원 전후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여 기원후 3~4세기에는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고조선시대부터 이미 중국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2) 고조선과 부여의 법률

부여에서는 사형당한 죄인의 가족을 노비로 만들었고, 고조선에는 ‘8조법’이라 하여, 법금에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3. 삼국시대 – 고구려

1) 고조선ㆍ삼국시대ㆍ고려의 생활상

- 옥과 구리 문명의 나라 고조선
- 최첨단 철기문명의 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
- ‘바다의 길’로 코리아에 들어온 쌀농사와 염장문화
- 실크로드보다 훨씬 오래된 코리아의 ‘해의 길’, ‘초원의 길’

2)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시대 만주 일대를 지나 몽골 어귀까지 진출하여 고구려 영토확장에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흔히들 생각하는 육지중심의 세계가 아닌 해양 면적이 더 넓고 광범위한 땅이었다고 합니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 성격으로 봤을 때 서양의 지중해와 유사하여 ‘동아지중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3)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나라 수군의 수장인 내호아는 공명심에 눈이 멀어 고구려 군의 유인작전인지도 모른 채 단독으로 평양성으로 진군합니다. 그 결과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사들에게 군사 대부분을 잃고 참패하게 되는데, 결국 수나라의 수군은 원래 임무인 물자보급을 책임지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수군이 패퇴하고 난 후 수나라의 30만 별동대는 남하해 압록강에서 고구려 군과 대치하게 됩니다.

4. 삼국시대 – 백제

1) 백제의 전성기

백제의 전성기는 4세기 근초고왕 때였는데, 이 때 백제는 한강 남쪽으로 비옥한 땅을 차지해 식량을 확보했고, 서남 해안으로 해상력을 장악하면서 국력을 강화해 갔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남쪽의 가야, 왜로까지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2) 백제를 발전시킨 고이왕

백제를 강력한 국가로 발전시킨 8대왕이었던 ‘고이왕’은 1품 관등을 가진 6명의 좌평을 두고 그들에게 각자 중요한 일을 맡겼습니다. 관리의 등급은 1품부터 16품까지 나누고 다른 색의 옷을 입게 했는데, 고이왕은 관리로서 부정한 뇌물을 받는 자와, 도둑질한 자는 훔친 물건의 3배를 내놓게 하고, 죽을때 까지 가두어 두는 강력한 법을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3) 백제의 금관 : 무령왕릉 출토 유물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 꾸미개는 나왔어도 완전한 금관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제 관 꾸미개는 금관의 세움장식이 ‘불꽃 무늬’모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완전한 백제 금관이 아니냐는 일부의 추측도 있었습니다.

5. 삼국시대 - 신라

1) 신라의 골품제

출신에 따라 1~6두품으로 나눠 관등은 물론 결혼대상, 가옥의 규모, 생활용품의 종류와 수까지 제한했던 계층세습제를 말합니다. 신분이 낮으면 실력에 상관없이 정ㆍ관계에 나가지 못하고 나가도 특정 직급 이상 승진을 할 수가 없었죠.

2)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신라시대 불상

신라시대의 불상은 불교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와 그레코로만 식의 건축이나 조각을 견지한 것입니다. 그리스인이 모델이 된 불상도 있다고 합니다.

6. 삼국시대 - 가야

1) 가야의 건국신화

가야의 건국신화는 두 곳의 기록에 전해 오는데, 하나는 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석이정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선시대에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인용한 것으로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중기에 김해의 지방관으로 파견된 어떤 문인이 지은 <가락국기를 고려 후기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인용한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입니다.

7. 삼국시대 - 통일신라

1) 한반도 최초 통일국가 ‘신라’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등 삼국과 한반도 쟁패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여 삼국통일을 한 국가입니다. 당시 동맹을 한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물리치고 진정한 통일국가를 이뤘는데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곳곳에 왕릉과 문화 유적이 도심 곳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2) 신라 삼국통일의 3주역 : 태종무열왕ㆍ문무왕ㆍ김유신장군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손꼽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과 30대 문무왕, 태대각간 김유신 장군에 대해 알아봅시다!

8. 남북국시대 – 발해, 신라

1) 해상왕 장보고

해상왕 또는 무역왕으로 불리우는 장보고! 그는 전남 완도인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과 신라 그리고 왜를 잇는 중개무역을 통해 극동의 작은 점에 불과했던 청해진을 동북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역과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습니다.

2) 발해 대조영 : 역사와 드라마 그 중점에서

발해 대조영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대조영’이라는 드라마는 그동안 잊혀져 온 발해사를 지상파 방송에서 처음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큽니다. 고구려사에 비해 기록이 없는 발해사를 드라마에서는 어떻게 다뤘는지, 그리고 왜곡된 점이 있는지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9. 고려시대

1) 개구리 리더십 ‘광종’

태조가 건국 과정에서 각 지방 호족의 딸들과 정략결혼정책을 펼친 까닭에, 태조 사후 고려는 호족 간 치열한 왕위 계승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가운데 두 형의 요절로 인해 왕의 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던 태조의 셋째아들이 고려 4대왕으로 오릅니다. 지방 호족중심이었던 고려를 강력한 왕권국가로 만들고, 정치 및 경제 개혁을 통해 500년 고려의 기틀을 잡은 광종입니다.

2) 서희의 강동6주

우리나라 외교 역사상 가장 극적인 협상은 거란의 80만 대군과 대결해 한 번의 싸움도 없이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되찾은 고려 영웅 서희의 멋진 담판이었습니다.

3) 최충헌과 교정도감

최충헌은 권력을 잡자마자 개혁을 시도했다. 이전까지는 중방이 최고 권력 기구였지만 이때부터는 교정도감이 대신했고 이곳에서 국가의 각종 중요한 정책을 집행했습니다. 반대 세력을 누르고 자기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려 한 그는 경제적으로는 넓은 영토를, 군사적으로는 도방과 삼별초를 자신의 사병처럼 거느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땅을 마구잡이로 빼앗고 문벌 귀족의 땅을 차지하여 자신의 농장으로 만들었고, 이렇게 백성들을 심하게 수탈하다 보니 무신정변 이전보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에 농민과 천민들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민중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4) 요동정벌

군제개혁안이야말로 정도전이 외쳐온 ‘요동정벌’을 위한 선행조건이었습니다. 정도전의 요동정벌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예컨대 1397년(태조 6년) 정도전은 측근인 남은과 결탁해서 태조 임금에게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5) 이방원의 참모가 된 ‘고려충신’ 하륜

하륜은 정도전처럼 팔방미인 스타일 즉 르네상스형(型) 참모였습니다. 정통 선비들이 볼 때, 이들은 '쓸데없는 학문'까지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문학•역사•철학 외에 도시공학•군사학•법률 등에까지 관심을 기울였고, 하륜은 문•사•철 외에 관상학•풍수학 등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6) 고려시대의 전시과제도

고려는 전시과라는 토지 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어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할 수 없게 되자 일시적으로 관리의 생계를 위하여 녹과전(祿科田)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미봉책으로는 관료들에 의한 권력형 토지의 독점적 폐단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재정은 날이 갈수록 고갈되어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7) 고려의 충신 정몽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8) 우리나라의 지도를 바꾼 간척지

농경을 위한 간척의 시작은 고려 고종 35년(1248년) 몽고병란때 식량 조달을 위해 청천강 하구에 제방을 축조한 것이 처음입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군량미 조달을 위해 강화도, 황해도, 평안남도 등에 간척지 조성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됐습니다.

9) 고려시대 천추태후

목종의 어머니이자 태조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 그녀는 고려시대 초, 여성으로는 유례없이 천하를 호령했던 독보적인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후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남자에 빠져 권력을 탐한 음탕한 여인’이라는 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녀가 ‘고려를 대표하는 여성 정치인’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도 근래의 일입니다.

10) 고려 첫 귀족인 문벌귀족의 도자기, 비색청자

청자는 처음엔 참선을 돕고 지혜를 얻기 위해 마시던 찻잔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점점 다양하고 화려한 모양으로 바뀝니다.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품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학문이 깊고 높다고 여겼던 귀족문화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비색청자가 권력의 다툼 속에서 더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것은 모두가 이런 상징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11) 고려 목조 불상

최초의 불상은 석가가 열반한 뒤 오래지 않아 그를 숭앙했던 밤사국의 우전왕이 향나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불교의 목공예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10. 조선시대

<조선전기>

1) 조선 7대왕 세조 : 수양대군

수양대군은 조선 제 6대왕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또, 왕위에 오르기 2년전인 1453년에는 계유정란을 일으켜 실질적인 조선의 권력을 쥐었었죠. 결국 단종에게 양위받아 왕위를 계승하는 형식으로 왕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 단종을 유배보내고 사육신 처형, 이시애의 난을 촉발시키는 등의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2) 조선경국대전

‘경국대전’에는 총 319개의 법조문이 이전, 호전, 예전, 형전, 병전, 공전의 6전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경국대전이 육전 체제로 구성된 것은 국가의 중앙ㆍ지방의 정치구조와 행정조직이 모두 6조 체제로 구성됐기 때문입니다.

3)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삼강(三綱)을 강조했던 조선시대에도 패륜 범죄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고 합니다. 세종은 패륜 범죄의 엄벌에 앞서 효행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배포하도록 주문하였는데, 그 서적이 바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입니다.

4) 세종 : 봄엔 한글 가을엔 공법을 고민하다

한글의 창시자로 알려진 세종대왕. 세종은 1444년, 그 해 봄에는 훈민정음, 가을에는 공법 문제를 주로 고민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토지세에 대해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공법이 탄생하게 되는데요. ‘공법(貢法)’은 토질의 전분6등법과 풍흉의 연분9등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5) 조선시대의 천문관측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부터 천문학자들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특히, 백제에는 역법 계산을 맡았던 曆博士가 있었고, 통일신라에는 天文博士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도 사천대, 사천감, 태사국 등의 천문 관측을 맡은 관청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천문 관측을 했을까요?

6) 조선시대 신분제도(1)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기혼 여성을 칭하는 말이 신분에 따라 달랐다고 합니다. 양반가를 중심으로 한 상류층 기혼 여성은 성 뒤에 ‘씨(氏)’라는 호칭을, 평민층은 ‘소사(召史)’, 향리와 중인을 위시한 중간층은 ‘성(姓)’이라는 호칭을 붙였습니다.

7) 조선시대 신분제도(2)

조선 초기에 과거제도는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전체의 40~50%에 이를 정도로 힘없고 약한 사람들에게 ‘출세의 사다리’였습니다.

8) 훈구 vs 사림

조선은 16세기 사림의 정계 진출로 학파가 정파로 전환되어 붕당이 형성되던 시대였습니다. 영남학파가 동인으로 기호학파가 서인으로 전환되었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립되어 남인 북인 서인의 삼당체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기존의 훈구파는 여전히 정치집단으로 존재했지만, 사림을 주축으로 정계가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9)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부를 침공한 세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유라시아 동부를 지배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걸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여름에 사망하자 전쟁을 계속 할 명분을 상실한 일본군은 열도로 되돌아갔습니다.

10) 병자호란과 백전대첩

당대 최강의 철기병으로 무장한 청나라군에 어렵게 맞서 싸웠지만 인조의 항복으로 인해 47일만에 종료되었던 전투 병자호란. 문신인 평안감사 홍명구와 무신인 평안병사 유림 간의 끊임없는 의견차이로 인해 진을 평지(홍명구)와 고지(유림)로 나눠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버티다 승리로 귀결된 <백전대첩>은 그나마 병자호란의 치욕에서 조선의 체면을 세워준 사건입니다.

11) 자격루

세종 16년(1434년) 장영실ㆍ김조ㆍ이천 등은 자격루를 제작하였는데, 기존과는 달리 정확한 시간과 오차가 적어 정교한 물시계로 인정받습니다. 자격루는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설치되어 3경에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 번 저절로 울리게 했습니다.

12)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에 지어졌습니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비들을 서우너에 모여 퇴계의 학문을 갈고 닦았다고 합니다.

13) 조선의 걸작 몽유도원도

우리나라 회화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힐 뿐 아니라 조선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술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의 모습을 15세기 중반인 1447년 당대 조선 최고의 화가인 안견이 3일만에 그린 그림입니다.

<조선후기>

1) 붕당정치론

조선의 당쟁을 붕당정치(朋黨政治)라고 불러야 할까요? 당쟁이란 당파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붕당정치’라고 하면 마치 식민통치를 극복하고, 당쟁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게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중당정치’라고 한다고 당쟁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도 아닙니다.

2) 조선의 19대왕 숙종

숙종하면 바로 ‘환국’을 떠올리실텐데요. ‘정치적 국면 전환’이라는 의미인 환국은 당파 교체와 정책 변화, 주요 인사 처분 등을 수반했습니다.

3) 정조와 다산 정약용

정조는 즉위한 지 2년쯤 지나 민생, 인사, 군사, 재정 네 가지 분야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법령을 정비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었다고 하는데요. 섣부른 정비보다 법령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4) 삼정의 문란

삼정의 문란이란 조선 후기 재정의 근간을 이루던 전정ㆍ군정ㆍ환정이 부정부패로 얼룩진 것을 일컫습니다. 전정은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의 세금을 말하고, 군정은 군포를 내어 복무를 대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환정은 춘궁기에 관청에서 쌀을 꿔주고 가을에 돌려 받는 빈민 구제책입니다.

5) 영조의 세제개혁

영조는 1년에 백성들이 부담하는 군포 2필을 12개월에 1필로 납부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반값 군포법 이었는데요. 이 반값 군포법을 ‘균역법(均役法)’이라 칭했습니다. 말 그대로 전체가 균등하게 국역을 책임지자는 뜻입니다.

6)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는 조선후기, 그러니까 17~19세기 초까지 일본에 파견됐던 使臣이자 문화사절단을 말합니다. 1607~1811년까지 모두 열두 번의 일본 사행이 있었는데요. 참여한 인원은 평균 470명 가량이었고, 기간은 1년 정도 걸렸습니다.

7) 조선의 보부상 집단

흔히 ‘장돌뱅이’라고 알고 있는 보부상은 조선 경제를 이끌어나간 밑바탕이었습니다. 독특한 문화와 풍습, 강력하고 독자적인 체계를 가진 하나의 경제집단이었던 보부상에 대해 알아봅시다.

8)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믿기 힘들겠지만, 청년시절 우울증을 앓았던 박지원. 연암 박지원하면 실학 사상이 떠오르는데, 실학 사상하면 자연스레 다산 정약용도 연상이 됩니다. 하지만 이 둘은 참 달랐는데요. 과거도 포기하고, 그렇다고 특정한 직업도 없었던 30대의 연암. ‘열하일기’를 통해 읽는 연암 박지원의 일대기.

9) 정약용의 기예론

다산 정약용. 그는 다산은 성(性)을 리(理)에 가두는 기존의 성리학 체계로는 자유를 추구하는 경제학 주체의 심성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봤습니다. 성기호설은 인간이 기호, 즉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태어나 이를 추구한다는 뜻인데요. 개개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10) 홍대용의 사상

조선의 실학자인 홍대용은 1765년 중국 베이징을 여행했는데, 이 여행은 담헌 홍대용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당연한 것으로 주어졌던 주자학의 테두리를 넘어, 서학과 다양한 사상들과의 조우를 통해 자신만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갈 계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11) 천주교전파

1790년 청나라에 있던 구베아 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고 이런 소식이 조선에까지 전파됩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믿고 숭배해야 하는 천주교에서 조상 숭배는 바로 미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제사를 금지한다는 소식에 정약용은 물론 정약전 이가환 등 기존에 천주교를 신봉했던 학자들과 수많은 신자들이 천주교를 버립니다.

12) 풍속화 : 김홍도와 신윤복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은 조선후기 대표화가 입니다. 두 사람은 서민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 풍속화의 대가로 나란히 거론되기도 하지만, 작품 속 붓놀림 등을 살펴보면 그림 취향과 지향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 백두산 정계비

백두산 정계비에서 시작된 울타리가 두만강 상류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 중국 학자에 의해 제기돼 파문을 던졌습니다. 정계비 울타리가 송화강 상류에 연결돼 있으며 두만강 상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은 것이죠.

11. 개항기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중건

정도전은 조선의 설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 내내 역적 취급을 받았습니다. 역적으로 몰리면 가솔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은 물론, 살아남은 후손들은 몸을 숨기며 살아가야 했는데요.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한 흥선 대원군은 궁을 설계한 정도전의 공로를 인정해 그의 봉작을 회복시켰습니다.

2)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두 차례의 군사적 정면충돌을 빚은 프랑스와 미국의 포함외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 앞에서 완전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때의 프랑스나 미국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라 개항을 요구했습니다.

3) 척화비

척화비는 일종의 승전 기념비인데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승리하면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전국 각지에 척화비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권하면서 척화비는 뽑히거나 깨어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4) 개항기

척화비는 일종의 승전 기념비인데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승리하면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전국 각지에 척화비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권하면서 척화비는 뽑히거나 깨어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5) 갑신정변과 임오군란

임오군란 이후 청은 한성(서울)에 병력 3000명을 주둔시키고 있었지만, 청불전쟁이 발생하자 그 절반을 베트남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이를 기회 삼아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는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6) 동학농민운동

전봉준은 지방으로 통문을 돌려 7월 보름날, 남원에서 대집회를 열어 명령체계를 갖추고 내부로 번지는 동요를 수습하였습니다. 전봉준이 있는 삼례로 농민군 4천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전봉준은 각지로 통문을 보내 군사를 불러 모았습니다. 이번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구국전쟁이었데요. 일본의 야욕을 간파한 농민들은 지도자 전봉준의 곁으로 다시 모여 들었습니다.

7) 독립신문과 서재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은 독립신문입니다. 한글 3개 면과 영문 1개 면 등 4개 면으로 인쇄된 독립신문은 처음에는 격일로 발간되다가 곧 일간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독립신문을 만든 주역인 서재필(1864~1951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려고 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했고, 그를 위해 의무교육 도입, 서양 과학기술 도입 등을 제안했습니다.

8) 신민회

대한제국이 점차 껍데기만 남은 나라로 되어 가는 과정에서 비밀결사 신민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일부 지식인들은 공화제에 점차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여러 잡지에는 서양의 정치사상과 정체가 자세히 소개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몽테스키외가 “정체에는 공화제, 입헌군주제, 전제군주제의 3종류가 있고, 다시 공화제 안에는 귀족공화제와 민주공화제가 있다”고 말한 것을 소개한 글들이 있었습니다.

9) 국채보상운동

일제에 진 빚 1천300만환을 갚기 위해 대구의 출판사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은 1907년 오늘 금연과 금주 등으로 모금운동을 시작했고, 멀리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레스으로도 확산됐습니다. 이들은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로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10) 을사5적 vs 을사7적

을사조약과 경술국치 앞에 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람들도 있었고 의병과 독립군으로 나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드러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1905년 11월에 국사를 앞장서서 맡고 있던 8인의 대신 중 7인이 을사조약 체결을 피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면서 사태의 진전에서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사양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11) 고종황제의 강제 양위식

1907년 7월20일 오전 8시 경운궁(현 덕수궁) 중화전.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기이한 양위식이 열렸습니다. 대한제국 황위를 물려주는 고종 황제도, 이어받을 순종 황제도 참석하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참석을 거부한 신•구 황제 대신 환관 두 명이 대역으로 동원돼 용상에 앉았고, 대신들이 하례를 올린 웃지 못할 촌극이었습니다.

12) 화폐정리사업

은행의 탄생은 개항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1920년대 이후 민간은행은 더 이상 설립될 수 없었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 과잉 투자 분야로 규정하면서 점차 상호 간에 흡수•합병돼 가는 순서를 밟았는데요. 은행 간의 흡수•합병은 은행 자본의 집중화 과정이자 한국계 은행 자본의 도태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13) 금수회의록

이 책은 주인공이 인간의 몹쓸 행태를 성토하는 동물들의 회의 광경을 꿈속에서 본 것을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우화소설이기도 하며 일본의 횡포와 관리의 부패상을 풍자하는 정치소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 사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킨 개화기의 대표적 기독교소설입니다.

14) 한일의정서 늑결, 독도 불법 강점

대한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1900년 10월 25일 고조 광무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불법 강점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독점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였습니다.

12. 일제강점기

1) 3.1운동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하여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습니다. 이로써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었던 것이죠. 이 같은 국내의 3․1운동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나아가 민족대연합전선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습니다.

2) 6.10만세운동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상 두번째로 큰 만세운동입니다. 조선의 마지막왕인 순종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항일운동이 일어난 것인데요. 순종의 상여가 통과하는 종로를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했습니다.

3) 대구 항일학생운동

6•10만세운동을 전후로 대구지역 항일학생운동은 사회주의운동과 결합해 좀 더 조직화되고 비밀결사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1927년 대구고보생들이 결성한 신우동맹은 혁우동맹, 적우동맹으로 변천했습니다. 1928년에는 일우당, 우리동맹, 서광회, 구화회 등의 결사체가 생겨났습니다.

4) 신간회

신간회 3개 강령은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절 부인함’이었습니다. ‘기회주의’란 물론 자치를 주장하는 민족 개량주의를 뜻했습니다.

5) 의열단

대한광복회라는 이름의 암살단 이념과 인맥은 의열단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도주하였다가 나중에 발견되자 격전 끝에 왜경 여럿을 죽이고 자결한 김상옥(金相玉) 열사와 권준(權俊)이 그들입니다.

6) 안창호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07년 29세 때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에 청년학우회, 1912년 대한인 국민회, 1913년에 흥사단, 1928년에 한국 독립당을 조직했습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려던 도산 선생은 이듬해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왔으며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7) 임시정부 수립과 이승만

행정수반에 이승만이 추대됐고,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이동휘, 재무총장 최재형,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등 6부 총장이 임명된 뒤 1919년 오늘 정부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8) 김구의 한인애국단 핵심인물들

한인 애국단의 핵심 멤버 3인으로는 이봉창, 윤봉길, 이화림이며 이화림은 1905년 1월 6일 평양에서 출생하여 3•1운동 참가 후 평양 일대의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다가 1930년 상해로 건너가 사격, 무술을 배웠고 일본군 밀사들을 유인 살해하는 등 맹활약을 했습니다. 이봉창 이 동경에서 던진 수류탄은 이화림이 상해에서 만들어 다리 사이에 채워준 주머니에 담아 간 것이라고 합니다.

9) 한민족의 이민사

일제 치하에선 조선인들의 일본 이주가 대거 이뤄졌습니다.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으로 인한 수탈 등으로 한국 땅에서 더 이상 살기 힘들어진 이들이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부관 연락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 매년 8만~15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35년엔 62만 명을 넘었습니다. 38년부터 강제 징용, 강제 징병으로 수많은 한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이들이 재일교포 1세를 형성했습니다.

10) 치안유지법

일본 법률사상 악명 높은 법. 1925년 일본에서 제정되어 조선에도 적용이 되었습니다. 일본이 이 법을 도입하게 된 것은 세계사의 변혁기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였는데요. 우리나라에는 치안유지법이 국가총동원법 체제(1938~1945) 하에 적용되었는데,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들 중 상당수가 반체제주의자로 분류됐습니다.

11) 민족 말살 정책

일본은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아예 한민족의 존재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민족말살정책의 정점은 창씨개명이었는데요. 혈연을 표시하는 성 대신 지연을 표시한 일본식 씨의 사용을 강요한 것이죠. 또,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하고 일왕이 있는 곳을 향해 매일 절하도록 했습니다. 전국의 학교와 면소재지에 신사를 세워놓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한글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쳤고, 교과과정에서 한글 교육은 아에 사라졌었습니다.

12) 정신대

미국 NARA의 문서상자 속엔 한국인 ‘성노예’(일본에서 사용되는 ‘위안부’란 표기는 일본군 입장에서 쓰였음) 20명에 대한 포로 심문 기록이 들어 있습니다.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끌려와 강제로 성노예가 되었던 사실이 적혀 있는데요. NARA에 소장된 성노예 관련 사진도 그들의 고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3) 2차세계대전과 한반도분단

얄타회담의 정식명칭은 크림회담인데 이들 연합군의 셈법은 각자 달랐습니다. 소련은 독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고 폴란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이끌어내는 것, 영국은 소련의 동유럽 점령을 막는 데 목표를 뒀습니다. 이들의 셈법이 결국 역사를 뒤바꿔 놓고 말았습니다. 한반도의 경우도 얄타회담에서 논의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군정을 실시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맞았습니다.

13. 현대

1) 김구와 광복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 김구의 임시정부

1919년 봄 한국 임시정부를 칭하는 조직 7개가 나타났습니다. 그중에는 전단만 뿌렸을 뿐,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것도 몇 있었지만, 서울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와 연해주에서 조직된 노령임시정부, 그리고 상해임시정부는 상당한 수준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세 조직은 그 해 9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습니다.

3) 해방 후 첫 공식일본방문

해방 초기 남과 북에서 이승만과 김일성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파격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입국부터 이승만은 달랐습니다. 이승만은 먼저 동경에 도착, 맥아더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맥아더는 이승만을 영접하기 위해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를 동경에 불렀습니다. 하지는 미군 군용비행기를 타고 이승만이 서울에 도착하자 조선호텔의 최고급 객실을 내주고 경호원을 붙여 주었습니다. 북에 들어온 김일성도 미국이 이승만에 베푼 환대 못지않게 소련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4) 반민특위 습격사건

반민특위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1948년 10월23일 발족, 출범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습니다. 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 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들이었고 이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습니다.

5) 해방후 임시정부 요인의 후손, 그들의 삶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에게 1945년 8월 15일은 꿈에도 기다리던 조국 독립의 날이었지만, 그 후손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삶의 시작을 알리는 변곡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선대의 독립운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굴곡의 삶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후 이승만 정권은 임시정부의 성과를 깎아 내렸고, 요인들의 자녀는 한국 땅에 정착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결국 많은 후손들이 한국 땅을 떠났습니다.

6) 6.25전쟁

1950년 6월25일 새벽. 대부분의 국가기반시설이 파괴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낸 6.25는 전쟁발발 3년이 지난 1953년 7월27일 1천129일만에 휴전됐습니다.

7) 남북한 토지개혁

북한은 4%의 지주가 전체 농토의 58%를 소유하고 있는데다 소작농이 75% 가깝게 되어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했습니다. 이 결과 지주들은 망했지만 소작농이 일시에 중농이 되어 그들이 모두 공산당원이 되었습니다.

8) 4.19혁명

4.19 혁명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시위는 시위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3월 18일경에 실종되었다가 시신에 최루탄이 박힌 채 경상남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의 기사를 통해 공개되면서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의 일가족은 사퇴 후 동반 자살하였습니다.

9)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적인 국가주도의 경제 계획입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61년 100달러 미만에서 1995년 1만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같은 기간 제조업 비중은 15% 미만에서 30%로 늘었고, 수출 비중은 1% 미만(4100만달러)에서 28%(1250억달러)로 급증했습니다.

10) 헌법개정

제2공화국은 4.19혁명으로 제3차 헌법개정이 단행돼 내각책임제가 채택됨에 따라 국무총리와 국무원의 지위가 강화됐고 총리실 산하에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한 공안위원회와 감찰위원회가 설치된 것이 특징입니다.

11) 유신체제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의 선두 역시 학생운동이었습니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 10월4일 서울대 법대, 10월5일 서울대 상대, 11월5일에는 경북대에서 유신반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73년 여름 이후 김대중 납치사건과 학생들의 유신반대 시위가 잇따라 일어나자 재야에서도 ‘유신 철폐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2) 남북공동선언

6.15공동선언이 반세기 이상 지속돼온 대립과 대결 구도를 청산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최초의 역사적 남북 정상회담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면, 7.4남북공동성명은 군사적 대결 구도가 한창이었던 1972년 남북이 극적으로 이끌어낸 첫 합의문건입니다.

저작권자 ⓒ EDUCE

본 내용을 블로그, 개인홈페이지 등에 게재하길 원하시는 분은
출처를 반드시 게재하시고, 해당페이지의 링크를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기타 궁금하신 사항은 [에듀스-고객센터]로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 목차보기
  • 트위터
  • 페이스북